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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정책

유럽이 워싱턴의 칩 전쟁에 제동을 걸다 — 동맹도 통제에 줄을 서지 않는다

게시일: 2026-06-25

수출통제ASML반도체주권지정학공급망

네덜란드가 워싱턴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확대에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자국 기업 ASML을 정조준한 MATCH 법안에 맞서 통상장관이 직접 워싱턴을 찾아 ‘국경 너머로 강요된 통제’에 반대했다. ASML은 중국에서 시스템 매출의 약 5분의 1을 얻는다. 동맹이 일제히 미국 통제에 줄을 서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고, 같은 사정권에 선 삼성·SK하이닉스를 둔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까지 칩 전쟁의 그림은 단순했다. 미국이 선을 긋고 동맹이 따른다. 네덜란드가 그 그림을 깼다. 테크크런치 보도에 따르면 네덜란드 통상장관 셰르트 셰르츠마가 워싱턴으로 날아가 상무장관 하워드 러트닉과 의회 인사들을 만나 MATCH 법안에 반대 의사를 전했다. 올해 4월 발의된 이 법안은 중국 반도체 기업의 서방 장비 접근을 막는 내용으로, 세계 유일의 첨단 노광 장비 제조사인 네덜란드 ASML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ASML은 유럽에서 가장 비싼 상장사이고, 중국은 그 시스템 매출의 약 19%를 차지한다. 회사는 2026년 매출의 약 20%, 한화로 수조 원에 해당하는 물량이 이미 허용된 구형 심자외선(DUV) 장비의 대중국 판매에서 나올 것으로 본다.

셰르츠마의 논리는 분명하다. 그는 “수출통제는 국경 너머로 정책을 강요할 때가 아니라, 각국이 확신에서 협력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는 일괄 금지가 아니라 사안별 심사와 ‘고도로 표적화된 비례적 조치’를 택하겠다고 밝혔다. ASML 최고경영자 크리스토프 푸케도 같은 결을 짚어왔다. 광범위한 통제는 서방 장비사의 시장 지위를 깎고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 뿐, 결국 중국의 기술 자립만 앞당긴다는 것이다. 통제가 막는 것은 최신 세대 장비이고 중국이 지금 살 수 있는 건 이미 구형이라는 점에서, 더 조이는 강수는 매출만 잃고 시간만 벌어준다는 계산이다. 미국과 네덜란드는 동시에 핵심 원자재·제조 역량의 대중국 의존을 줄이려는 ‘팍스 실리카’ 구상에 함께 서명하기도 했다. 한쪽에선 협력하고, 다른 쪽에선 통제의 범위를 놓고 부딪히는 어색한 동거다.

한국 스타트업·산업에 주는 함의

핵심은 동맹조차 미국 통제에 무조건 줄을 서지 않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수출통제가 워싱턴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 동맹 간 협상의 산물이 되면, 통제의 범위와 속도는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한국은 이 흐름의 한가운데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대규모 생산 거점을 두고 있고, 미국의 장비·기술 통제와 중국 시장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는다. ASML이 처한 딜레마 — 중국 매출에 깊이 의존하면서 미국의 역외 압박에 노출된 구조 — 는 한국 메모리 산업의 사정과 판박이다. 네덜란드가 보여준 건, 자국 산업 이익이 걸리면 동맹도 ‘예외 없는 통제’에 저항한다는 사실이다.

창업자에게 이건 공급망 주권의 문제로 번역된다. 첫째, 장비·소재의 원산지 리스크다. 반도체 하드웨어나 그에 의존하는 제조 스타트업이라면, 특정 통제 체제에 묶인 단일 공급원에 전부를 걸어선 안 된다. 통제선은 정치적으로 그어지고 정치적으로 옮겨진다. 둘째, 표적화·비례성이라는 새 기준이다. 네덜란드식 사안별 심사가 표준이 되면, 무엇이 막히고 무엇이 풀리는지가 품목별로 갈린다. 자기 사업이 어느 칸에 들어가는지 미리 읽어둬야 한다. 셋째, 편들기의 비용이다. 미·중 어느 한쪽에 사업을 묶을수록 반대편 시장과 공급선이 닫힌다. 한국 스타트업의 강점은 오히려 양쪽 어디에도 과하게 종속되지 않는 설계에서 나올 수 있다.

지금 봐야 할 것

MATCH 법안이 실제로 통과되는지, 통과된다면 네덜란드식 ‘비례적 예외’가 얼마나 반영되는지를 지켜봐야 한다. 이것이 향후 동맹 통제의 템플릿이 된다. 다음으로 ASML의 중국 매출 가이던스 변화다. 회사가 추정한 대중국 물량이 정책에 따라 어떻게 깎이는지가 통제의 실효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위치다. 미국이 동맹을 강하게 묶으려 할수록, 한국 역시 사안별 협상과 자국 산업 보호 사이에서 같은 줄타기를 하게 된다. 통제가 정치로 출렁이는 시대에, 공급망에서 어느 한쪽에 묶이지 않는 설계 자체가 경쟁력이다.